[ 김제 ]
호남평야의 젖줄인 만경강과 동진강이 적시는 전북 김제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드넓은 평야와 하늘이 만나는 지평선, 그것도 누렇게 물든
황금들녘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또 예로부터 우리나라가 농경사회였음을 증명하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저수지인 벽골제가 바로 이곳에 자리잡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벽골제는 축조 당시 동양에서
가장 큰 저수지였다고 하는데, 토질과 지리적 여건이 합쳐져
우리나라 농업발달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
바로 김제이다.
[ 벽골제 ]
김제의 벽골제는 제천의 의림지, 밀양의 수산제와 함께 삼한시대의 저수지로
알려져 있으며,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저수지로서 오늘날 사적 제111호로
지정되어 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흘해왕 21년(330)에 쌓았다고 씌어 있지만
당시에는 이 지역이 아직 신라의 세력에 들어 있지 않았으므로
백제 비류왕 27년에 쌓은 것을 신라 연대로 환산하여 기록한 것이리라.
벽골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 둑이다.
벽골제의 주요 수원은 원평천과 두월천이고, 이 두 천이 합류되는
지점을 막아 물을 가두어 만든 것이다.
이 벽골제는 물을 저장해 두었다가 부족할 때 사용했던 조상들의
슬기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수리시설이다.
둑의 높이는 북단이 4.3m, 남단이 3.3m이며 원래는 다섯 개의 수문
(수여거, 장생거, 중심거, 경장거, 유통거)을 통해 김만평야 일대에
물을 대었다. 그러나, 일제시대에 둑의 한가운데를 파서 수로를 만들었기
때문에, 둑은 두개로 잘려지고 수문도 3개가 사라지고, 지금은 남쪽의 끝의
수문인 경장거와 북쪽 끝의 수문인 장생거, 그리고 중앙 수문인
중심거 자리에 거대한 돌기둥들이 남아있고 수문 등이 복원되었다.
현재 벽골제는 2500m의 제방과 장생거와 경장거 2개의 수문만이 남아있는데
이 두개의 수문에 대해서 두 차례의 발굴 조사가 행해졌으며, 1980년에
장생거에 대한 복원 작업이 이루어졌다. 각 수문지마다 높이 550cm,
폭 750cm 두께 50~60cm인 석주가 2개씩 서 있고, 석주의 안쪽면 가운데에는
폭 20cm, 길이 12cm의 홈이 위에서 아래 까지 파여 있다. 이 홈에 목판을
끼워 놓고 그것을 상하로 움직여 방수량을 조절하였던 것이다.
석주 사이의 바닥에는 물이 흐를 때 바닥이 패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납작한 석재를 깔아 놓았다. 장생거와 경장거는 저수지의 물을 아래로
내보내는 통로이었기 때문에, 석재로 견고하게 만들어졌다.
벽골제란 김제의 백제 때 지명인 볏골을 한자로 옮겨 적은 것이다.
그후 신라 원성왕 6년(790)에 증축되었고 고려 현종 및 조선 태종
15년(1415)에도 개축되었다. 임진왜란 때 관리.유지가 전폐된 이래
주변의 농민들이 헐어서 경작지로 사용하기도 했다.
특히 1925녀 일제의 동진농지개량조합에서 이 둑을 농지 관개용
간선 수로로 개조하여, 둑의 폭을 종단하고 그 가운데로 수로를 만들어
농업 용수를 흐르게 함으로써 원형이 크게 손상되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연인이 이 둑을 걸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있다.
전통문화행사 쌍용놀이
신라 원성왕때 무너지기 직전에 있던 벽골제를 보수하기 위하여 원덕랑이라는
기술자를 파견하고 태수에게 명령을 내려 주민들을 동원케 하였다. 그런데
벽골제 주위에는 청룡과 백룡이 살았는데 백룡은 백성들이 농사를 잘 지을수
있도록 천재풍우변란(天災風雨變亂)을 막아주고 벽골제도 수호해 주었는데 반해
청룡은 심술이 궂어서 백성들을 괴롭힐 뿐만아니라 인명을 살상하는 등
백성들에게 갖은 피해를 주었다. 이 청룡은 벽골제 보수공사가 완성단계에
이르렀을 때 갖은 심술을 부리기 시작하여, 공사를 하지 못하도록 폭우를
내리고 천둥과 번개를 쳤으며, 제방을 헐려고 하였다. 이때 백룡이 나타나
제방을 무너뜨리지 말라고 충고하지만 청룡은 막무가내였다. 드디어 두 용은
처절한 싸움을 시작하였으나 백룡은 사나운 청룡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참패한 백룡이 피를 흘리며 물러나자 청룡은 꺼릴것 없이 제방을 헐었다.
청룡이 행패를 부리자 달아났던 백성들은 청룡의 노여움을 풀어 주려면
처녀를 바쳐야 한다고 하여 멀리 서라벌에서 약혼자 원덕랑을 찾아온 월내라는
처녀를 바치기로 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김제태수의 딸 단야는 자신이
그녀 대신 제물이 되기로 결심하고 제방을 마구 무너뜨리는 청룡에게 다가가
"수많은 백성들이 피땀흘려 쌓은 제방이니 제발 헐지 말고 수호하여 풍년이
계속되게 해달라"고 간절히 부탁하며 제물이 된다. 월내 대신 단야가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안 백성들은 청룡이 사는곳에 배를 띄우고
그녀의 넋을 위로 하였다.
이 같은 전설을 극화한 것이 버로 "벽골제 쌍룡놀이"인데 1975년 9월에 열린
제16회 전국 민속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으며, 민속자료 제10호로
지정되고, 해마다 열리는 "지평선 축제"때 실시되고 있다.
[ 벽골제수리민속유물전시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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