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귀신사 ]
귀신사는 금산사에서 모악산 서쪽 고개를 통하여 전주로 넘어가는
길 옆에 있는 청도 마을에 자리잡고 있다.
지금의 이 절은 대한 불교 조계종에 속해 있는데 처음 세워질 때에는
화엄종이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이 절은 의상대사(義相大師)가
문무왕(文武王) 16년(676년)에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절의 이름은 국신사(國信寺), 귀신사(鬼神寺), 구순사(狗脣寺)
또는 귀신사(歸信寺) 등으로 불렸는데, 각각의 이름이 어느 시기에
그렇게 불렸는지 알 수 없다.
현재 절에는 지방유형문화재 제62호인 3층석탑을 비롯하여 지방유형문화재
제64호인 석수와 지방유형문화재 제63호인 부토(浮屠) 등의 석조물이 있으며,
건물로는 보물 제 826호인 대적광전(大寂光殿), 명부전(冥府殿) 그리고
한 채의 공양 집이 있다.
[ 대적광전 ]
귀신사 대적광전은 판석으로 면석을 이루고 그 위에 갑석을 얹은
기단 위에 서 있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표계 맞배지붕 집으로
양옆에 풍판을 달았다. 앞쪽 처마를 겹처마이고 뒤쪽 처마는
홑처마로 된 것이 특이하다.
정면 3칸에는 빗살 창호를 달고 좌우 퇴간은 벽체로 처리했다.
임진왜란 때 절이 불탄 후 곧 복구한 건물로 보이며 보물 제826호로
지정되어 있다. 안에는 법(法), 보(報), 화(化) 삼신불(비로자나불,
석가모니불, 노사나불)을 모셨다.
모드 소조불인데 1980년에 금물을 입혔다.
건물에 비해 불상이 너무 커서 앞에 선 사람은 머리를 한껏 뒤로 젖혀야
불상의 얼굴이 보일 정도다.
이렇게 건물이 터져나갈 듯 큰 불상은 완주 송광사에서도 볼 수 있는데,
두 절의 불상들은 같은 시대 같은 사람이 만들지 않았나 생각될 만큼
양식 기법이 유사하다.
법당 좌우 벽면과 뒷벽 일부에까지 매우 수준 높은 소조 16나 한상과
석가삼존상이 기대어 있어서, 그것들을 모셨던 웅진전이 비교적 근래에
인멸된 것으로 여겨진다.
본존불인 법신불 비로나자불
좌협시 보신불인 노사자나불
본존불인 법신불 비로나자불
우협시 화신불인 석가모니불
[ 명부전 ]
명부전은 저승의 유명계(幽冥界)를 사찰속으로 옮겨놓은 전각이다.
이 전각 안에 지장보살을 봉안하고 있기 때문에 지장전이라고도 하고,
유명계의 심판관인 시왕을 봉안하고 있기 때문에 시왕전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조선초기까지는 지장전과 시왕전이 각각 독립된 전각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이미 지장신앙은 신라의 원광법사에 의해 지장보살의
자비와 원력에 귀의하는 참회 불교가 유포되었으나 신라의 지장신앙에
관한 자료에서 시왕의 이름을 찾을 수 없음은 물론 "고려사"에 나타나는
수많은 불교도량의식 속에서도 지장경도량이나 지장연명경도량의 잦은 개최와
염라왕에 대한 의식은 언급되고 있으나, 시왕에 관한 의식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시왕신앙은 당나라 말년에 장천(藏天)이 편찬한 "예수시왕생칠경
(豫修十王生七經)"에 근거하고 있는데, 도교의 신인 시왕을 불교에서 수용한
다음, 시왕에게 공양하고 죄(?)업을 참회하는 칠재의(七齋儀)를 행함으로써
사후에 좋은 세상에 태어날 수 있음을 밝히는 경전이다.
이 경이 고려초기에 전해졌지만 널리 유포되지 못하다가, 원나라가 이 땅을
강점한 고려말부터 널리 유포되어 시왕신앙이 형성되어 갔다.
조선초기의 억불정책 속에서도 유교의 효사상은, 망인의 형벌 및 새로 태어날
세계를 결정하는 심판관 시왕과 망인을 자비로써 인도하는 지장보살의 결합을
용인하여, 이 들 시왕과 지장보살의 결합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고,
마침내 독립되어 있었던 지장전과 시왕전을 명부전이라 결합, 탄생되었던 것이다.
석수와 석탑이 있는 곳
[ 석수 ]
석수의 몸길이는 158cm이고 높이는 62cm이다.
등에 올려진 석주는 2단으로 되어 있는데 아랫부분이 72cm, 윗부분이 40cm이며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64호로 지정되어 있다.
돌짐승상은 삼층 석탑이 서 있는 방향과 달리 서 있다.
멀리 보이는 규봉을 바라보고 서 있는 것이다.
이곳은 모악산 봉우리들로 둘러싸여 아늑한 느낌을 주는데
멀리 규봉이 남의 집 담을 기웃거리듯 살짝 들여다보는 형상이라
이 돌짐승을 세웠다 한다.
이 돌짐승은 사자 같기도 하고 개 같기도 한데 풍수지리를 하는 사람들은
이곳이 구순혈(狗脣穴:개의 음부를 상징)이란다.
이 돌짐승상은 언제 만들었을까?
어떤 이는 백제 법왕때 왕실원찰용으로 만들었다고 그러고
또 다른사람은 조선후기에 만들었다고 하기도 한다.
생각으로는 임진왜란 이후 조선후기에 만들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임진왜란 이후 인조 때 왕실원찰로 창건된 '완주 송광사'의
대웅전 앞에 있는 석물과 느낌이 너무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완주 송광사와 귀신사의 사적기를 쓴 자수 무경 스님도
17세기말-18세초에 활동을 하셨고 대적광전 뒷편 언덕의 돌짐승상을
근거로 귀신사가 백제 왕실 원찰이라고 한 것은 송광사 대웅전 앞에
남아있는 돌짐승상을 염두에 둔 주장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그 돌짐승상들은 '석등'을 올려놓은 짐승이었고, 석등과 석주는
그 모양이 완전히 파손되어 남근석 비슷하게 되어 다음과 같은 엄청난
오해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불교와 민간싱앙의 남근숭배사상이 어우러진 신앙미술품으로,
서쪽을 향해 엎드려 앉은 짐승상 등위에 남근석을 올려놓은 모양이다.
[ 석탑 ]
화강암으로 만든 정사각형의 석조물로서 귀신사가 창건되던 당시에
백제계 석탑으로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높이 는 4.5m이다.
탑의 기단부는 계단식의 3단으로 되어 있는데 동쪽 부분이 제일 아래
기단석이 심히 이탈되어 있다.
기간의 윗층 한 변의 길이는 223㎝이다.
1층 몸돌은 각각 딴 돌로 네 우주를 세우고 판석을 끼워 고정시켜
면석을 삼고 있으며, 2층 이상에서는 한 개의 돌에 우주를 조각하는
수법을 사용했다. 옥신은 1층의 우주와 면석이 8개의 석재로 되어 있고,
2층과 3층의 경우는 하나의 석재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1층의 우주 중 동북쪽 방향의 것은 윗부분이 면석으로부터
5㎝쯤 벌어져 있어서 금방이라도 탑이 무너질 것 같은 불안감을
자아내고 있다.
옥개석은 1층에 8개, 2층은 4개, 3층은 1개의 석대로 되어있고
각층 옥개석의 1면의 길이는 1층부터 280㎝, 230㎝, 180㎝이다.
몇 장의 판석으로 짜인 층단식 기단은 외곽석을 포함하여 3단을
다루지만 높이와 폭이 축소되어 1층 지붕돌의 폭 보다 좁다.
상윤부는 노반만 남아있다.
지붕돌은 몇 장의 얇고 편편한 돌로 짜여졌으며 아래에는 사릉형
받침이 있고 뒤에는 몸돌 받침으로 네모진 판석을 놓았다.
지붕돌 모서리에 풍령을 달았던 구멍이 있다.
이 석탑은 지금까지 몇 차례에 걸쳐서 도굴당하거나 붕괴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복원되어 있는 이 탑의 모습은 원형대로 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
즉 이 탑의 옥개석 위아래에 옥석 괴임 판석과 옥석 받침 판석이
끼어 있는데 2층 부분에서 이 두 판석이 뒤바뀌어 있기 때문에
현재의 2층 옥석 받침판석이 기이한 현상을 보이고 있다.
*http://www.guisinsa.org/(귀신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