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아 그 라

[인도/아그라] ①사랑으로 빚어낸 아름다운 무덤 타지마할

러브송. 2016. 3. 31. 02:08



동이 틀 무렵, 옅은 안개 사이로 보이는 건축물, 신비롭고도 단아한 모습이다.
이것이 인류가 만든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자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이란다.
인간이 남긴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타지마할에는 무굴제국의 영광과 세기의 사랑이 깃들어 있다.




       

                [무굴 5대 황제 샤자한]

 

타지마할을 세운 왕조 무굴제국은 어떤 나라였을까?
무굴은 정복왕조로 인도의 마지막 봉건왕조다.

무굴제국의 초대 황제는 바부르, 2대 후마윤, 3대 악바르, 4대 자한기르, 5대 샤자한, 6대 아우랑제브다.

한때 무굴제국은 인도 전역에서 1억여 명을 다스리던 대제국이었다.
무굴제국을 세운 세력은 원래 중앙아시아에 근거를 두고 있던 유목민이었다.
이들은 끊임없이 영토를 확장했고, 특히 인도를 차지하기 위해 오랫동안 애를 썼다.
이를 실현한 인물이 무굴제국 초대 황제 바부르(재위 1526~1530)였다.
그는 칭기즈칸의 후예이자 중앙아시아에 대제국을 건설했던 티무르의 5대손이었다.

그는 과거 티무르가 인도를 점령했었고, 자신은 티무르의 후손이기 때문에

자신이야말로 인도를 지배해야 할 정당한 군주라고 주장하며 인도를 침공했다.

결국, 1526년 파니파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델리에 있던 술탄을 굴복시켰다.
드디어 멀리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세력이 인도를 장악하는 무굴시대가 열린 것이다.
무굴시대의 전성기를 연 인물은 무굴제국 3대 황제 악바르(재위 1556~1605)였다.
그는 치열한 정복전쟁을 통해 무굴세력을 인도 전역으로 넓혀나갔다.
악바르는 아그라에서 37여km 떨어진 곳에 수도를 정하고 파테푸르 시크리라고 이름을 붙였다
파테푸르 시크리는 '승리의 도시'라는 뜻이다.

파테푸르 시크리를 보지 않고는 아그라를 봤다고 말할 수 없다.

지금도 파테푸르 시크리에는 무굴양식과 힌두양식이 혼합된 재미있는 건축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무굴 황제 중의 최고라고 지칭되는 정복왕 악바르 시대에 무굴제국은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했다.

악바르는 아버지인 제2대 황제 후마윤 왕의 묘(재위 1530~1556)를 둥근 돔이 있는 건축양식으로 건설했다.

5대 왕 샤자한은 후마윤의 묘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100년 뒤에 타지마할을 건립했다.
3대 황제 악바르 이후 무굴제국의 영광은 그의 손자인 5대 왕 샤자한으로 이어진다.
당시에 4~5개 나라가 무굴제국에 속해 있었다.

아프가니스탄, 네팔, 방글라데시, 미얀마, 파키스탄 등인데, 당시 이들 국가는 무굴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악바르 통치 때는 건축술이 발달했고, 그 이후에 샤자한이 황제가 되었을 때 상당히 많은 기념비적 건축물을 지었다.
무굴제국 5대 황제 샤자한(재위 1628~1658)은 과거 인도 수도였던 올드델리에 거대한 도시를 건설했다.
샤자한은 델리를 수도로 정하고 '샤자한 나바드'라고 이름 붙였다. 샤자한 나바드는 '샤자한의 거처'라는 뜻이다.
당시에 40만이 살 정도로 샤자한의 도시는 거대한 규모였다.

당시(샤자한 시대) 샤자한 나바드는 11개의 게이트를 가지고 있었다. 그 문은 아그라로 오고 가는 통로였다.
샤자한은 델리에 델리 포트와 자미 모스크, 아그라에 타지마할을 건설했으며,

델리와 아그라 두 지역을 거점으로 수도를 옮겨가며 무굴제국의 영화를 이어갔다.

지금 남아있는 당시의 거대한 규모의 건축물을 보면 무굴제국이 얼마나 부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뭄타즈마할]


샤자한과 뭄타즈마할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살펴보자.

야무나 강변에 있는 아그라 포트는 샤자한 왕의 사랑과 슬픔이 서려있는 곳이다.
왕자 시절 샤자한은 무굴제국의 영화 속에서 행복을 누리며 아그라 성에서 살았다. 

1607년 어느 날 야무나 강변에 있는 왕궁 아그라 성에서 여인들을 위한 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15살의 왕자 샤자한은 그 시장에서 운명의 여인을 만나게 된다.
샤자한은 왕궁에서 열린 여인들을 위한 미나(숙녀) 바자르(
시장)에서 뭄타즈마할을 처음 만났고

보는 순간 두 사람은 사랑에 빠져버렸다. 뭄타즈의 본명은 아르주만드 바누 베감이다.

뭄타즈마할은 샤자한이 붙여준 이름으로 '궁전의 영광'이란 뜻이다.
15살의 왕자 샤자한과 14살의 아름다운 소녀 뭄타즈마할은 서로 사랑하게 되었고

5년 후인 1612년 무굴인들의 축하 속에서 세기의 결혼식인 성대한 결혼식을 치렀다.
결혼 후에도 샤자한과 뭄타즈마할은 이곳 아그라 포트에서 살았다. (자스민 타워:뭄타즈마할과 샤자한이 살던 곳)
1627년 샤자한은 왕위를 이어받아 무굴제국의 5대 황제가 되었다.
왕과 왕비가 된 두 사람의 사랑은 여전히 식을 줄 몰랐고, 모두 13명의 아이를 낳았다.

무굴 제6대 황제 아우랑제브가 그들의 셋째 아들이다.
황제 샤자한과 그의 아름다운 왕비 뭄타즈마할의 사랑은 무굴제국의 영화와 함께 영원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랑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말았다.

1631년 샤자한은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출정했는데, 이때 14번째 아이를 가진 만삭의 뭄타즈마할도 원정에 동행했다.

불행히도 샤자한이 반란군을 진압하는 동안, 왕비는 14번째 아이를 낳다가 그만 죽고 말았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큰 슬픔에 빠진 왕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사랑하는 왕비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어 바치는 일뿐이었다.
1632년 샤자한은 아그라 남쪽에 궁전형식의 아름다운 묘지를 짓기 시작했다.

야무나 강변 습지에 대건축물인 타지마할을 짓기 위해 최고의 기술이 동원되었다.
세계 각국의 최고 건축가들을 참여시켰고, 매일 2만 명의 인부가 동원되었으며,

건축 자재도 주변 여러 나라에서 거액을 돈을 들여 사들였다.

대리석 벽면을 수놓은 수많은 보석과 준보석들은 세계 각지에서 조달되었다.

타지마할을 짓기 위해 당시 5억 달러에 육박할 정도로 막대한 비용을 쏟아부었다.

22년후 마침내 아그라의 언덕에 웅장한 타지마할이 세워졌다.

타지마할이 완성된 직후 샤 자한은 군사를 동원하여 건설에 참여한 모든 인부의 손목을 잘라버렸다.

그것은 타지마할보다 더 아름다운 궁전을 짓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니, 샤 자한의 광적인 집착을 엿볼 수 있다.






오 황제여!
그대는 타지마할의 아름다움으로
시간에 마술을 걸려 했습니다.
그대는 경이로운 화환을 짜서
주검을 죽음을 전혀 모르는
우아함으로 덮었습니다 .-타고르-

타지마할은 1983년 유네스코에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고,

새하얀 대리석으로 빛나는 타지마할은 350년 세월을 견디며 영원한 사랑의 세레나데가 되었다.

이제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지었다는 아름다운 무덤, 타지마할을 직접 보러 가자.







타지마할을 구경하려고 동문으로 갔지만, 동문으로는 입장이 불가능했다.

남문만 개방하고 있어 남문으로 다시 가야만 했다.

날씨가 얼마나 더운지 남문까지 걸어가려고 생각하니 타지마할을 보기도 전에 지쳐버릴 것만 같았다.

365일 늘 관광객이 넘쳐나는 타지마할은 아침 일찍부터 긴 줄이 이어진다는데,

동문 매표소에는 사람이 그리 붐비지는 않았다. 남문 매표소에만 그런 모양이다.

우리는 숙소가 동문 가까이에 있어서 동문으로 갔지만, 대부분 사람은 남문으로 바로 가는 것 같았다.

타지마할 입장권은 인도인은 20루피(약 350원), 외국인은 750루피(약 13,100원)이다.

차이가 나도 너무 차이가 난다. 인도는 어디를 가나 내국인 외국인 입장료가 터무니없는 차이를 보인다.

인도를 찾은 많은 관광객이 타지마할을 보려고 이곳에 몰려오고 있으니, 입장료 수입만 해도 어마어마할 것이다.

750루피 중, 250루피는 타지마할 입장료, 500루피는 ADA 요금이란다.

ADA 요금은 아그라의 모든 볼거리에 들어갈 때 내는 일종의 특별 세금이다.

원래는 볼거리마다 이런 ADA를 부과했는데, 외국 여행자들이 너무 비싸다고 항의를 해서 그나마 완화된 것이

타지마할 입장 시 ADA를 구입하면 당일에 한해 아그라와 파테푸르 시크리의 다른 볼거리에 부과되는 요금을 면제해준다.

하루 만에 다 보지 않으면 500루피를 또 더 내야 하므로, 오늘 타지마할과 아그라 성을 꼭 둘러보리라 마음먹었다.




Complimentary shoe cover with foreign ticket
Complimentary mineral water with foreign ticket

동문에는 티켓 파는 부스랑 생수와 신발 커버를 주는 데스크가 따로 있었다.

티켓을 살 때 생수랑 신발 커버에 대한 아무런 멘트가 없었다.

모르면 그냥 못 받아가는 시스템이었다. 별거는 아니지만 750루피나 받으면서 안내는 똑바로 해줘야지.

생수와 타지마할 내부로 입장할 때 신발 위에 덧신는 비닐 신발 커버를 꼭 챙겨야 한다.

타지마할 내부로 입장할 때는 반드시 신발을 벗어야 하는데, 외국인이라고 그나마 신발 커버를 제공해주는 것 같다.

인도인들은 그냥 맨발로 뜨겁게 달구어진 대리석 바닥을 까치발을 하면서 걸어가는 걸 볼 수 있다.






다행히 동문에서 남문까지 전기셔틀버스가 무료로 운행되고 있었다.

표를 사고 밖으로 나오자 어떤 남자가 뭐라고 하면서 우리를 다른 건물로 안내했다.

전기버스가 오려면 1시간을 족히 기다려야 한다며, 옆 건물에 들어가서 쉬다가 가라는 뜻인 것 같았다.

카페 같기도 하고 레스토랑 같기도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 역시 호객행위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전기버스는 아니지만, 카트에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 카트냐고 물었더니 타지마할 남문으로 간다고 했다.

1시간이나 기다려야 한다는 저 아저씨 말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인도사람 말은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오질 않는다.

열 사람에게 길을 물으면 열 사람 다 다른 답을 한다는 나라가 인도 아니던가.

인도에서는 아무도 믿지 말고 나 자신만 믿는 게 현명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남문에 다다르자 자그만 전기버스도 보이고, 사람들을 가득 태운 카트도 보였다. 

인도의 대표적 건축물인 타지마할이 점점 검게 부식되고 있어서 인도정부는 1994년부터 타지마할 반경 4km 이내에는

기름으로 움직이는 모든 차량의 접근을 금지하고, 전동버스와 사이클 릭샤등 비매연 차량만이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





입구에는 군인과 경찰들이 총을 들고 지키고 있었다.





타지마할로 들어가는 입구는 마치 출국절차를 밟듯 삼엄한 검색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테러를 대비하기 위해서란다. 국보급 문화재니 당연한 일이다.

타지마할로 입장할 때 반입금지 품목이 너무 많았다.

라이터, 성냥, 칼, 스케치북이나 연필 같은 필기구, 모든 음식 등등

건물에 해가 되는 도구는 일체 금지이며, 음식물 또한 금지품목이었다

반입금지 품목은 미리 호텔에 빼놓고 왔는데도, 가방 안에 있던 껌을 발견하고는 압수했다.






안으로 들어섰지만, 아직 타지마할은 보이지 않았다. 긴 회랑으로 연결된 출입구가 또 있었다.

타지마할로 들어가는 정문(무케두아르)이다.

정문은 붉은 사암에 대리석 일부를 사용한 전형적인 이슬람양식 건축물이다. 
아치형 입구에는 아랍어로 코란의 경구들이 새겨져 있었다.

아치형 문안으로 수많은 사람이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타지마할을 만들면서 1년이 지날 때마다 출입문 건물에 작은 첨탑을 하나씩 올렸다고 한다.

출입문 꼭대기에 있는 뾰족한 첨탑 개수를 세어보니 앞에 11개, 뒤에 11개, 모두 22개였다.

22개의 첨탑은 22년의 공사 끝에 완공되었다는 표시다.





아치형 문으로 들어서자 눈이 부시도록 새하얀 대리석 건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열광하며 사진을 찍느라고 야단들이었다. 





정문의 아치를 빠져나가자 넓은 마당에 수로를 둔 전형적인 무굴양식의 정원과 분수가 펼쳐졌다.

타지마할 입구에서 영묘까지는 약 300m, 영묘에 이르는 한가운데는 연못과 수로가 조성되어 있었다.

하얀 대리석 돔과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의 첨탑을 보니 이곳이 천당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타지마할 바깥세상은 가난한 인간의 땅이요, 타지마할 안의 세상은 신의 세상처럼 보였다.

이것이 단지 죽은 자에게 바쳐진 무덤이라는 사실이 그저 놀랍기만 했다.

겉으로 봐서는 전혀 무덤 같지 않았고, 그 어떤 왕궁보다도 더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타지마할은 왕궁이 아니라 무굴제국 5대 황제인 샤자한이 사랑하는 왕비 뭄타즈마할을 위해 세운 무덤이다.

타지마할은 뭄타즈의 무덤이기도 하지만, 신의 심판 이후, 그녀가 다시 세상에 돌아와 누릴 낙원이기도 하다. 






외벽 전체가 하얀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타지마할의 핵심은 완벽한 대칭, 돔과 아치가 보여주는 완벽한 곡선미라고 한다.

건물과 입구에서 길게 이어진 수로와 정원의 완벽한 좌우대칭은 완벽한 균형미와 정갈함 그 자체다.

길이가 약 300m에 이르는 일직선의 수로 중앙에는 연꽃 모양의 수조들이 있는데,

분수가 물을 뿜으면 환상적이고도 몽롱한 풍광을 자아낸다. 이때 수로에 비친 타지마할의 모습 또한 환상적이다.

완벽한 대칭을 이루고 있는 타지마할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알 수 없는 몽롱한 신비감이 느껴졌다.





파란 하늘에 우뚝 솟아있는 하얀 대리석의 둥근 돔, 타지마할의 거대함은 가히 상상을 초월했다.
야무나 강 변에 세워진 타지마할은 동서 300m, 남북 560m의 넓은 대지 위에 세워졌다.




지표에서 첨탑까지 높이는 107m, 그중 중앙 돔의 높이만도 25m에 이른다.
건물의 높이는 67m, 거대한 중앙 돔을 사이에 두고 4개의 작은 돔이 있다.

영묘 기단부의 크기는 사방 95m, 본체는 사방 57m, 높이는 67m, 네 귀퉁이 세워진 미나레트(첨탑)의 높이는 43m나 된다.

내부는 가운데 팔각형의 중앙홀을 중심으로 8개의 방이 완벽한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다.
중앙 돔은 텅 비게 만들어 무게의 부담을 줄였고, 실제 무덤은 지하에 조성되어 있다.





타지마할 쪽에서 바라본 출입구 모습이다. 

넓은 정원과 어우러진 붉은 사암으로 지어진 입구 건물도 빼어나게 아름답다.








타지마할 뒤편 북쪽은 야무나 강이 흐르고, 높은 축대로 쌓인 강 쪽의 뒷면을 제외한 나머지 삼면은 모두 높은 담으로 둘려져 있다.



긴 회랑으로 연결된 망루 모습





타지마할을 중심으로 동서방향에 모스크와 영빈관이 있다.

메카를 향하고 있는 서쪽 건물이 모스크(지성소)이고, 이에 균형미를 맞추기 위해 동쪽에 지어진 건물이 영빈관이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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