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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신의 『 은교 』

러브송. 2010. 8. 17. 19:07
그애는 손녀 같았고 어린 여자 친구 같았으며, 아주 가끔은 누나나 엄마 같았다.
아, 나는 한은교를 사랑했다. 사실이다. 은교는 이제 겨우 열일곱 살 어린 처녀이고 나는 예순아홉 살의 늙은 시인이다. 아니, 새해가 왔으니 이제 일흔이다. 우리 사이엔 오십이 년이라는 시간의 간격이 있다. 당신들은 이런 이유로 나의 사랑을 사랑이 아니라 변태적인 애욕이라고 말할는지 모른다. 부정하진 않겠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좀 다르다. 사랑의 발화와 그 성장, 소멸은 생물학적 나이와 관계가 없다. '사랑에는 나이가 없다'라고 설파한 것은 명저 [팡세]를 남긴 파스칼이고 사랑을 가리켜 '분별력 없는 광기'라고 한 것은 셰익스피어다. 사랑은 사회적 그릇이나 시간의 눈금 안에 갇히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가. 그것은 본래 미친 감정이다. 당신들의 그것도 알고 보면 미친, 변태적인 운명을 타고났다고 말하고 싶지만, 뭐 상관없다. 당신들의 사랑은 당신들의 것일 뿐이니까. 은교는 박범신 작가가 불과 한 달 반 만에 쓴 소설이다. 작가는 폭풍 같은 질주였으며, 때로 한없이 슬펐고, 때로 한없이 충만했다고 고백한다. 다 쓰고 났을 때 몸안에서 무엇인가, 이를테면 내장들이 쑥 빠져나간 듯했다고 한다. 쭉정이가 되어 어둔 방구석에 가만히 누워 저만치 흘러가던 나의 젊은 날이 어느새 돌아와 내 옆에 나란히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은교를 읽으면서 단순한 인간의 욕망에 관한 책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책을 읽어가면 갈수록 그 욕망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고 그건 단순한 욕망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 한 예술가의 영혼을 뒤흔드는 순수한 사랑이고 열정이었다. 사랑은 늙어버린 시인의 육체와 정신을 일깨우고 있었던 것이다. "할아부지.. 아무 죄 없어요! 진짜로.. 시인이었어요! 저는요, 바보같이 아무것도 몰랐어요. 할아부지가 나를요, 이렇게 갖고 싶어하는지도 몰랐다구요. 이까짓 게, 뭐라구요. 뭐예요... 바보같이, 자기 혼자서.." 시인의 노트를 읽고 울부짖는 은교의 마음을 나는 충분히 이해한다. 노시인의 영혼을 흔드는 사랑의 깊이를 이해했더라면, 그 진실을 알았더라면, 은교도 시인을 사랑하지 않았을까. 노시인이 그렇게 갈망하던 욕망을 은교는 허락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진정으로 깊은 마음으로 사랑한다면, 자신의 영혼을 뒤흔들만큼 깊은 사랑을 하는 것이라면, 그 사랑을 내가 알게 된다면,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불행하게도 그 사랑의 깊이를 알지 못한다. 드라마나 소설 같으면 서로의 마음을 읽어갈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상대가 보여주는 사랑만큼만 볼 수 있다. 나는 가끔 남편에게 이런 말을 한다. 진정으로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언제든지 보내준다고..ㅎㅎ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런 사랑이 오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런 사랑이 온다면 정말 놓쳐서는 안되는 절호의 기회일 것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그런 사랑이 가능할까? 지금껏 쌓아온 모든 현실을 저버릴 만큼 깊은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순수와 열정을 잃어가는 요즘 그런 사랑이 그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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