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풍문화재단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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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淸風)은 통일신라 이래로 충청도에서는 유서깊은 고장이었습니다.
청풍명월(淸風-明月)이란 말에 어울릴 만큼 아름답고 긴 역사를 간직하고
있었지만 충주댐 건설에 따른 담수조치로 이제는 그 발자취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나마 청풍의 옛 영화를 극히 적은 부분만이라도 간직하고 있는 곳이
청풍문화재단지입니다.
문화재단지 안에 있는 문화유산들은 개발에 밀려 제자리를 잃고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모여 있어서 마치 박제된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누각이며, 고가 하나 하나에는 모두 선조들의 숨결과 손때가 묻어 있으며
제각기 사연들을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1983년 역사의 고을 청풍이 수몰되는 것을 아쉬워하던 많은 학자와 주민들 덕으로
수몰의 위기에서 겨우 건져낸 것이 오늘날의 청풍문화재단지입니다.
충북 제천시 청풍면 물태리 일대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청풍지역 문화재들은
제자리를 잃었기 때문에 본래 간직했던 의미는 다소 퇴색되었지만
한곳에 모여 있는 덕분에 보존될 수 있고 또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청풍팔영루]
이 누문은 조선 숙종 28년(1702)에 부사 이기홍이 현덕문이라고 한 그 터에
고종 7년(1870) 부사 이직현이 다시 중수하였습니다.
팔영루는 청풍부를 드나드는 관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집입니다.
북측의 돌계단을 딛고 올라서면 성누문답게 홍예를 쌓은 높은 대 위에
우뚝 서 있습니다. 내부에는 우물마루를 깔고 난간을 둘렀으며,
부사 민치상이 청풍팔경을 읊은 팔영시로 하여 팔영루라 하였답니다.
[금병헌]
명월정이라고도 하며 조선 숙종 7년(1681)에 부사 오도일이 창건하였습니다.
그후 영조 2년(1726)에 부사 박필문이 다시 옮겨 개축하고 당의 이름을
금병헌으로 바꾸었습니다. 현판글씨는 권돈인이 썼습니다.
옛 동헌으로서 집회 및 집무를 처리했다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건물구조는 건평이 40평으로 팔작지붕에 정면 6칸 측면이 3칸으로 된
목조건물입니다.
[청풍석조여래입상]
이 불상은 전체적인 조각양식으로 나말려초인 10세기경 작품으로 보입니다.
불상의 얼굴 모양은 풍만하고 자비로운 상으로 두툼한 양볼에 인중이 뚜렷하고
두귀는 양 어깨까지 드리워져 있습니다.
목에는 삼도가 양각되어 있으며 왼손은 땅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의습은 통견의를 걸치고 안에 납의를 받쳐 입고 있으며
배에는 매듭을 지어 V자형으로 겹겹이 대좌에까지 내려왔습니다.
[응청각]
이 건물의 용도는 알 수 없으나, 본래 한벽루의 좌측에 나란히 세워져 있었습니다.
처음 세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명종 초 이황 (1501~1570)이 단양군수로 있을때
'응청각'이라 이름하였다고 합니다.
인조15년(1637)에 충청감사 정세규의 일기에 응청각에서 유숙한 기록이 있습니다.
고종37년(1900)에 부사 현인복이 중수하였습니다.
본래 청풍면 읍리 203-1번지에 있었으나 충주댐의 건설로 1983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습니다. 2층 누각으로 아래층은 토석축의 담으로 벽을 막고, 그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집입니다.
건물 좌측에 목조 계단을 만들어 2층으로 오르내리게 하였습니다.
[금남루]
조선 순조 25년(1825)에 부사 조길원이 세운 관청의 정문으로 고종 7년(1870)년에
고쳐지었고, 1985년에 청풍문화재단지 안으로 옮겼습니다.
이곳은 청풍부의 아문으로 도호부절제아문(都護府節制衙門)이란 현판이
걸려 있는데, 건립 당시의 부사 조길원이 쓴 것입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팔작지붕집입니다.
1층은 3개의 문으로 되어 있는데, 가운데 문은 부사가 출입했고
양쪽 문은 평민이 출입했다고 합니다. 2층에는 난간을 둘렀으며
사방이 탁 트여 멀리있는 적의 동정을 살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청풍한벽루-보물 제528호]
이 건물은 고려 충숙왕 4년(1317) 당시 청풍현 출신 승려인 청공이 왕사(王師)가 되어
청풍현이 군(郡)으로 올려지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객사의 동쪽에 세운 건물입니다.
원래 위치는 청풍면 읍리에 있었으나 충주댐을 세우면서 1983년 청풍면 물태리로
옮겨 세웠습니다. 건물 안에는 송시열·김수증의 편액과 김정희의 ‘청풍한벽루’
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밀양의 영남루(보물 제147호), 남원의 광한루(보물 제281호)와 함께 본채
옆으로 작은 부속채가 딸려 있는 조선시대 누각 건물의 대표적인 예이며,
세 건물 가운데 가장 간결하고 단아한 외관을 갖추고 있습니다.
[청풍 후산리 고가]
이 집은 본래 청풍면 후산리 105번지에 있었던 민가였습니다.
충주댐의 건설로 1985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 한 것입니다.
조선말기에 지어진 ㄱ자형의 팔작 기와집입니다.
대청마루를 기준으로 하여 동남을 향하고 있습니다.
대청의 우측에 2칸 크기의 건너방과, 툇마루를 높이 하고
그밑에 함실 아궁이를 두고 있습니다.
중부지방의 보편적인 민가유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연자방아]
[석물군-고인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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