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고서원 ]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국어시간에 달달 외웠던 시조,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답니다.
조선 3대 임금 태종 이방원은 고려 말 충신이었던 정몽주에게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세우는 일에 가담할 뜻이 있는지
<하여가>를 지어 그의 마음을 떠보았죠.
그에 대한 대답으로 읊었던 정몽주의 <단심가>입니다.
정몽주가 영천 출신이라는 사실을 아세요?
그의 묘는 고향이 아닌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에 있습니다.
정몽주의 묘를 처음에는 풍덕군에 썼으나 후에 고향인 경북 영천으로 천묘할 때
면례행렬이 용인군 수지면의 경계에 이르자 앞세웠던 명정이 바람에 날아가
현묘소의 자리에 떨어져 이곳(모현면)에 안장하였다고 합니다.
임고서원은 경북 영천시 임고면 양향리에 있으며
영천 임고 출신이며 고려말 충신이자 성리학의 대가로 추앙받는
정몽주 선생을 배향하기 위해 명종 8년(1553) 향내 유림들이 창건한 사액으로
포은 선생 영정(보물 제1110호), 임고서원 소장전적(보물 제1109호) 등
국가 및 지방문화재를 소장하고 있습니다.
임고서원은 조선 명종 8년(1553) 임고면 고천동 부래산에 노수, 김응생,
정윤량선생 등 향내 유림들이 세운 사액서원입니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없어진 임고서원을 1600년경 이곳에 다시 지었다고 합니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선조 36년(1603)에 다시 지었으며,
이 때 임금으로부터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습니다.
서원이란 훌륭한 선현의 영정이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곳인데
서원에서는 사당과 달리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까지 했던 곳입니다.
서원에서 뽑힌 학생들이 성균관 등 대학에 진학을 했습니다.
사액서원이란 조선시대에 설립된 서원 가운데 국가로부터 특별히 공인된 서원으로
사설기관인 서원의 역할이 국가의 정책에 연결되면서 국가의 공인을 받아
서원명 현판과 노비·서적 등을 하사 받았던 서원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임금에게 서원의 이름과 전답 등을 하사받은 서원을 말하는데
사액서원은 임금의 허가를 받은 공식 서원이며 다시말해 사립학교인 셈입니다.
최초의 사액서원은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서원을 소수서원으로 사액받은 것입니다.
소수서원은 명종 5년(1550년) 임금이 친필로 쓴 '紹修書院'이란 편액을 하사함으로써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습니다.
인조 21년(1643)에는 여헌 장현광을, 영조 3년(1727)에는 지봉 황보인을 추가로 모셨고
그 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5년(1868)에 철거되었으나
1919년 존영각을 건립하여 포은 선생의 영정만 모시고 향사를 지내왔습니다.
1965년에 정몽주의 위폐만을 모시고 복원하였으며, 1980년에 보수 정화하였습니다.
서원 앞에는 수령 500년이 넘는 거목 은행나무가 버티고 있는데
높이는 20m, 둘레는 5.95m에 이릅니다.
본래 이 나무는 임고서원이 부래산에 있을 당시 그곳에 심어져 있었는데
임진왜란으로 인해 없어진 임고서원을 1600년경 이곳에 다시 지으면서
은행나무도 옮겨 심은 것이라 합니다.
정성껏 차린 깨끗한 음식이나 맑은 정화수를 이 나무 아래에 갖다 놓고
성의껏 기도를 드리면 부녀자는 생남하고 병자는 소생한다고 합니다.
영천시는 2008년까지 95억원을 들여 임고서원 성역화 사업을
단계적으로 추진하고 있는데, 휴식공간이 조성되는 건 좋지만
옛모습이 점점 더 사라지는 것 같아 아쉬운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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