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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문경] 흙내음 맡으며 걷는 산책길 문경새재

러브송. 2009. 7. 8. 19:57
[문경새재]
흙냄새 폴폴 나는 흙길을 걸어보고 싶지 않으세요? 신발을 신지 않고 흙의 감촉을 느끼며 맨발로 걸으셔도 좋습니다. 흙길 옆으로 시원스레 흘러내리는 계곡물에 발을 담궈도 좋습니다. 영남의 선비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걸었던 새재길을 흙내음 맡으며 걸어보세요.
새재는 새도 날아 넘기 힘든 고개, 또는 억새풀이 많은 고개로 풀이됩니다. 어떤 이는 조선시대에 가장 늦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새 길'이라는 뜻에서 새재가 되었다고도 하고, 조령산과 주흘산의 깍아지른 사이로 난 길이어서 '샛재'라고 하던 것을 발음하기 좋도록 새재라 했다고도 합니다. 어쨋든 이름에 대한 유래가 다양하다는 것은 그만큼 이 길이 많은 사람에게 이용되었고, 그 때문에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렸음을 입증해주는 것입니다. 문경새재 제 1관문(주흘관)에서 제 3관문까지(조령관)는 약 10Km 정도 되는 거리입니다. 차가 다니지 않는 흙길이어서 맨발로도 올라갈 수도 있는 최고의 트래킹 코스입니다.
예로부터 영남지역에서 서울로 향하는 길은 크게 3가지가 있습니다. 가장 먼저 개척된 것은 고구려와 신라가 외교길로 삼았던 죽령이고, 그 다음으로 개척된 것은 추풍령입니다. 그리고 고려 태조왕건이 토끼를 쫓다가 발견했다는 문경새재는 가장 늦게 사람의 발길이 닿았던 길입니다.
[옛길 박물관]
조선시대 이래 영남지역은 선비가 가장 많이 나던 곳입니다. 선비에게 가장 큰 경사는 뭐니뭐니 해도 과거에 급제하는 것이었습니다.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올라갈 때 오르는 길은 대개 죽령, 추풍령, 조령인데, 죽령으로 넘었다가는 주르르 미끄러진다 하고, 추풍령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는 징크스가 있다고 했으니, 과거에 급제할 요량이라면 마땅히 문경새재를 택해야 했을 것입니다.
청운의 꿈을 안고 이 고개를 지나 한양으로 향하던 선비들의 바램이 고을의 이름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문경(聞慶)'은 경사를 듣는다, 또는 경사가 전해진다는 정도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선비들이 이 길을 이용했기 때문에 '영남'이란 말도 조령의 남쪽이라는 데서 유래했다고도 합니다. 문경새재 옛길은 제 1관문에서 새재 계곡을 따라 제 3관문까지 이어집니다. 추풍령을 지나는 경부고속도로가 428km 이지만 새재를 통해 충주를 거쳐 서울로 가면 380km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길은 조선시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던 영남대로였습니다.
당시의 교통여건으로는 낙동강과 한강을 잇는 가장 짧은 고갯길이었던 새재는 영남의 선비를 비롯한 보부상, 영남의 세곡과 궁중 진상품등 각종 영남의 산물이 새재길을 통해 충주의 남한강 뱃길과 연결되어 서울 한강 나루터에 닿았습니다. 따라서 새재는 한강과 낙동강의 수운을 활발하게 연결시켰던 교통의 요충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문경새재는 조령산성 조령원터를 비롯하여 수많은 문화유적들이 남아있는 역사의 현장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영남 제1관 - 주흘관]
영남 제1관문인 주흘관은 새재 입구에 있는 성문으로 사적 제 147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숙종 34년(1708년)에 축조하였고, 영조 때에 조령진이 설치되어 문경현감이 수성장을 겸하였습니다. 한말 항일의병운동 때에 일본군이 불태웠던 문루를 1922년에 다시 지었습니다.
개울물을 흘려 보내는 수구문이 있어 3개 관문 가운데 가장 옛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1966년 문경군 교육청에서 제 1관문을 보수하였습니다. 향토예비군이 창설 이후 전략요충지라 하여 1973년 예비군 700여명이 성벽위에 촉과 높이 1정도 중축하여 총구를 만들어 원형이 다소 변경되었습니다.
주흘관은 정면 3칸 측면 2칸 협문이 2개가 있고 팔작지붕이며 3개의 관문중 가장 옛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새재 제 1관문은 국방상의 요충지입니다.
제1관문을 지나 조금 오르면 오른편에 큰 기념탑이 하나 보입니다. 이 기념탑은 경북도가 개도 100주년을 기념해 지난 1996년에 세운 타임캡슐입니다.
첨성대형을 띠고 있으며 100품목 475종의 물품이 매설되어 있습니다. 이 캡슐은 경북개도 500주년이 되는 2396년 10월 23일에 후손들의 손에 의해 개봉될 예정입니다.
[조령원터]
제1관문에서 2관문까지 거리는 3km에 달합니다. 그 길은 그리 험하지 않고 곳곳에 유적이 남아 있어 심심치 않게 걸을 수 있습니다. 첫번 째 만나는 유적은 조령원터입니다. 조선시대 길손들의 숙박과 물물교환장소로 이용되었던 곳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여행의 편의를 제공하던 시설(지금의 여관)로서 원과 관의 제도가 있었는데 원은 반관, 반민성격으로 고려시대부터 있어온 것이지만 그것이 하나의 교통기관으로 제도화된 것은 조선왕조부터였습니다.
문경새재는 험할뿐 아니라 호랑이를 비롯한 맹수들, 그리고 도적떼가 늘 도사라고 있었기 때문에 혼자서는 넘을 수 없는 곳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그래서 날이 저물거나 혼자 지나는 객이 있으면 잠시 유숙하면서 동행을 구하던 곳도 조령원이었습니다. 지금은 새재원터만이 옛날 그대로 보존되어 오고 있고 나머지 원은 기록으로만 전해올 뿐 흔적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교귀정]
교귀정에 올라 앉아 하늘땅을 즐기는데, 문득 깨달으니 귀밑머리 흰빛이로다. 한 가닥 흐르는 물은 바람과 더불어 노래 부르고, 일천 바위는 그림 같지만 날은 저물어만 가누나. 내가 시로써 경치를 읊으며 날새는 보금자리 찾아 헤메고 눈물로 회포를 되씹으메 원숭이마저 그 울음 멈추도다. 남쪽 길 두 이정표는 이미 어두워 그 모양 사라져만 가는데 아 ~~ 달 밝은 오늘밤은 어디에서 머물 것인고. 김종직이 교귀정에서 쓴 시입니다. 교귀정은 조선시대 임금으로부터 명을 받은 신.구 경상감사가 업무를 인계인수하던 교인처로 성종 때(1465~1487) 건립된 후 폐허가 되어 유지만 남아있던 것을 1999년 중창하였습니다.
[용추]
용이 꿈틀거리어 소용돌이 헤치니 잠긴 하늘에 밝은 해가 새롭다. 갠 날 우뢰소리에 흰 무지개 뻗치니 황홀하구나. 누가 그 신비를 알리. 팔왕폭포라고도 불리는 용추는 하늘과 땅의 모든 신인 팔왕과 선녀가 어울려 놀았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새재 주민들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 주민들도 이 곳에서 기우제를 지낸답니다.
[조곡폭포]
[제2관문 조곡관]
제2관문 조곡관은 문경새재의 3개 관문 가운데서 가장 오래되었습니다. 조선 선조 27년 1594년에 설치되었는데, 제1,3 관문보다는 100여년 앞선 것입니다. 1907년 일제에 의해 없어졌으나 1975년 복원되었으며, 문루이름도 옛 조동문을 버리고 조곡관이라고 이름하였습니다.
조곡관
이 길을 걸어가면 장원급제를 한답니다.^^
장원급제 길은 숲이 우거진 오솔길입니다. 산책하기에 아주 좋은 길이랍니다.
[책바위]
오솔길을 따라 걷다보면 돌로 쌓은 책바위가 나타납니다. 이곳에서 소원을 빌면 장원급제를 한다는 전설이 전해져서 해마다 입시철이면 하루 수백여명의 수험생과 학부모들이 책바위를 찾아와 합격을 빌고 간답니다.
[책바위 이야기]
책바위에는 장원급제와 관련된 전설이 인근 주민들 사이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 전설에 따르면 옛날 문경새재 인근에 살던 큰 부자가 천신만고 끝에 아들을 얻었는데 아들이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허약해 용한 도사를 찾아가 물으니 "집을 둘러싼 돌담이 아들의 기운을 누르고 있으니 아들이 직접 담을 헐어 책바위 뒤에 쌓아놓고 정성을 들여 기도하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부자는 도인의 말대로 3년 동안 아들에게 담장의 돌을 하나씩 책바위 뒤로 옮기게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아들의 몸이 튼튼해졌으며 공부도 열심히 해 과거에 장원급제를 하고 출세해 가문을 일으켰답니다. 이후 이곳을 넘나들던 선비들이 책바위 앞에서 소원을 빌면 장원급제했다는 전설입니다.
[영남 제3관 - 조령관]
조곡관에서 제3 관문인 조령관까지는 경사가 꽤 급한 편입니다. 주흘관과 조곡관은 남쪽에서 침입하는 왜적을 방어하기 위해 성문이 남쪽을 향하고 있는데 조령관은 북쪽을 향하고 있습니다. 북쪽에서 침입하는 오랑캐를 방어하기 위한 것인데, 북쪽의 적을 막기 위해 선조때 쌓았고 숙종때 중창했습니다. 제3관문을 기준으로 남쪽은 경북 문경이고 북쪽은 충북 충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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