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 피 타 임/향 기 글 방

그리운 날엔 창가에 선다

러브송. 2009. 5. 31. 18:27

     나는 오래 전부터 커다란 창이 있는 방을 가지고 싶었다. 
     벽이 한면이 온통 창으로 되어 있는 방, 
     창이 아니라 차라리 유리벽이라고 부르고 싶을 만큼 
     전망이 투명하게 열려 있는방. 
     나는 벽이 온통 유리창으로 된 방을 가지고 싶다.
     나는 그 커다란 창이 있는 방에서 창밖을 내다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싶다. 
     나는 그런 방에서 차를 마시고 음악을 듣고 
     사람들에 대하여 생각하고 싶다.
     내 생각의 태반은 언제나 사람에 대한 것이다. 
     내가 가장 깊게 그리고 가장 진지하게 생각하고 싶은 것은 
     사람들과의 관계로 얽힌 일들이다. 
     사람들과 만났던 일, 그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 
     사람들이 있던 풍경과 그들 사이에서 일어났던 일, 
     혹은 아름답고 혹은 설레고 혹은 가슴 아픈 일들… 
     그렇지만 이런 일들도 대부분은 우리 삶 속으로 떨어지는 
     한 송이 눈처럼 순히 일상 속에, 녹아들게 될 것이다. 
     외로운 날이면, 
     창가에 서서 사랑하던 사람들을 추억하고 싶다. 
     사랑하던 이름을 꼽아 보면서, 
     그리운 사람에게 띄울 편지의 첫구절을 생각하고 싶다. 
     나는 사람들에게 섭섭했던 일들을 창가에서 삭이고 싶다. 
     믿음을 저버림으로 해서 나를 몹시 슬프게 했던 사람들도
     나는 창가에 서서 용서하고 싶다. 
     나는 외로울 때면 창가에 선다. 
     나는 거기서 숨결을 보다 순하고 느슨하게 정돈한다. 
     외로울때 만일 벽을 향해 선다면 나는 얼마나 심각해질까. 
     행동의 시작이요 출발의 명령인 문 앞에서 
     나는 많은 갈등을 겪을 것이다. 
     나는 그 문을 열어야 할 것이고 열고서 어디든지 가야 하겠지. 
     황망히 신호등을 건너서 인파 속으로 스미든지 
     초조와 번잡으로 나를 뒤엉키게 해야겠지. 
     나는 외로울 때 창가에 서기도 하지만, 
     망연히 창가에 서 있음으로 해서 문득 외로움을 느낄 때도 있다. 
     창을 향해 서는 것은 대화와 화해를 원한다는 의미다. 
     창은 열려 있음의 표상이다. 
     열려 있는 정의 통로로 우리는 
     서로의 순수와 진실을 알기 위해 손을 내밀어도 된다. 
     창은 길이 아직 트여 있다는 것, 
     트여 있으므로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일러 준다. 
     그래서 창은 꿈을 갖게 한다. 
     유리창이 커다란 방안에서 나는 열심히 밖을 내다 보며 꿈을 꾸고 싶다. 
     그러나 창밖에서는 오히려 나를 들여다 보며 구경할는지도 모른다. 
     어항 속의 물고기를 들여다보듯이 
     누가 나를 들여다보고 있을는 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는 몸뚱이가 마알갛게 들이비치는 누에처럼 
     나를 투명하게 노출할 것이다. 
     나는 나를 은폐할 수 없는 창이 커다란 방에서 무슨 일을 할까? 
     발가벗은 몸처럼 내가 훤히 투시될 수 있는 창이 커다란 방안에서 
     나는 어떤 몸짓을 해야 할까? 
     무대에 올라선 주연 배우처럼 시선을 모으면서 나는 
     우아하게 찻잔을 들고 손을 예쁘게 모아 기침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희고 가지런한 이를 보이며 잔잔한 미소를 지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창은 나를 황후처럼 고결하게 되는 연습을 시킬지도 모른다. 
     창으로 내다보이는 바깥 세상은 늘 한가하지가 않다. 
     계절이 차례로 지나가고 물살처럼 떼지어 흘러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 도시의 지붕 아래 저토록 많은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오후. 
     사람들은 혹은 한유하게 혹은 바쁘게 그들의 바람을 일으키면서 걷는다. 
     그들은 그들의 리듬을 튕기면서 걷는다. 
     가로수 잔가지 위로 구름은 잠시 쉴 자리를 찾고, 
     먼지 끼인 도시의 우울한 대기가 이리저리 옮겨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행복과 비운이 비껴서 가고 
     만남의 약속과 헤어짐의 선언이 이어지는 것을 보면서 
     한결같이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는 창. 
     거기 모여든 햇살이 순금의 씨날을 높여서 내 발등을 덮어주고, 
     음습한 내 마음의 그늘을 걷어서 무한의 하늘로 보내는 창. 
     나는 창가에 서면 하늘을 보고 싶다. 
     나는 외로운 방안에서 헤어 나오고 싶을 때 창가에 선다. 
     창은 외로움과 외롭지 않음이 마주치는 곳. 
     외롭지 않은 사람의 방황하는 발길을 주저앉히고 
     외로운 사람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주는 것이다. 
     유리판이 커다란 창가에 서면 먼 바다의 파도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창밖에 바로 세상이 있고 어둠이 뻘밭같다 할지라도, 
     창 안에서 창 밖을 내다보는 아늑한 시간을 나는 내 시간표 속에 빨간 
     동그라미로 표시하고 싶다. 
     설령 그것이 일시의 착각으로 스러진다 할지라도 
     나는 창이 주는 위안을 사랑한다. 
     외로워질 때면 나는 찻잔을 들고 창가에 선다. 
     누군가 그리운 날엔 창가에 선다. 
     이/향/아


 

41856

 

'커 피 타 임 > 향 기 글 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먼 산  (0) 2009.06.09
그런 날이 있습니다.  (0) 2009.06.07
봄비 내리는 날에는...  (0) 2009.05.21
미명에 띄우는 편지   (0) 2009.04.29
봄이 그냥 지나요   (0) 2009.0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