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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남양주] 다산 정약용 유적지를 찾아서

러브송. 2008. 6. 23. 20:55
[ 다산 문화의 거리 ]
술에 취하면 하루가 가고 목민심서에 취하면 천년대계가 이루어진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대학자이며, 우리 역사의 문턱에 서서 시대를 고뇌하고 미래를 꿈꾸었던 역사의 주인공입니다. 일찍이 북학을 받아들여 백성들의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을 만들고자 밤새 고민했던 과학자이며, 1년에 100편이 넘는 시를 쓴 의욕적인 예술가입니다. 그의 손이 거쳐간 곳이면 어디나 백성을 아끼는 마음,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는 조선조의 질서가 붕괴의 조짐을 보이던 시절에 새로운 조선을 꿈꾸었으며, 정조의 죽음으로 정치적 패배를, 또한 유배로 학문적 성취를 이루었습니다.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현마을은 실학의 대가였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선생의 고향입니다. 선생은 문장과 경학(經學)에 뛰어난 학자로서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1801년(순조.1) 신유사옥 때 전라남도 강진으로 귀양 갔습니다. 생가 인근엔 조성된 다산유적지에는 문화관, 기념관, 생가, 묘소, 사당 등이 있으며 다산문화거리까지 조성되어 제법 볼만한 관광지로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다산은 초당에서 머물며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간 학문에 몰두해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로 실학을 집대성했습니다. 18년이란 장기간에 걸친 유배생활 속에서도 민생을 위한 경세의 학문인 실학을 연구하여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500여권에 이르는 방대하고도 귀중한 저서를 남겼습니다. 다산은 모두 함께 더불어 잘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정치, 경제, 교육, 사회전반에 걸친 개혁을 부르짖은 시대의 개혁가이자, 애국ㆍ애민의 한 길만을 걸었던 참 선비였습니다.
문화의 거리에 들어서면 양쪽으로 목기둥이 줄지어 서 있습니다. 하나의 조형물로 전시되어 있는 목기둥에는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의 주옥같은 글이 새겨져있습니다.
독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몇년 전부터 독서에 대하여 깨들은 바가 무척 많은데 마구잡이로 그냥 읽어내리기만 하는 것은 하루에 천번 백번을 읽어도 오히려 읽지 않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무릇 독서할 때 도중에 의미를 모르는 글자를 만날 때마다 널리 고찰하고 세밀하게 연구하여 그 근본 뿌리를 파헤쳐 글 전체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날마다 이런 식으로 책을 읽는다면, 한가지 책을 읽더라도 수백가지의 책을 엿보는 것이다. - 학유에게 부치노라, 1808년 겨울 다산에서 -
목민심서(牧民心書) 군자의 학(學)은 수신이 그 반이요 나머지 반은 목민의 것이다. 성인의 시대가 이미 멀어졌고 그 말씀도 없어져서 그 도가 점점 어두워졌으니, 오늘날 백성을 다스리는 자들은 오직 거두어들이는 데만 급급하고 백성을 기를 바는 알지 못한다. 이 때문에 하민(下民)들은 여위고 시달리고, 시들고 병들어 서로 쓰러져 진구렁을 메우는데, 그들을 기른다는 자는 바야흐로 고운 옷과 맛있는 음식으로 자기만 살찌우고 있으니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이것은 진실로 내 덕을 쌓기 위한 것이요, 어찌 꼭 목민에만 한정된 것이겠는가. '심서(心書)'라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목민할 마음은 있으나 몸소 실행할 수 없기 때문에 '심서'라 이름한 것이다. <목민심서 서문, 1821년> <목민심서>는 1818년 유배지인 전라도 강진의 다산초당에서 완성된 저서입니다. 그것은 지방의 고을을 맡아 다스리는 수령들이 백성을 기르는 목민관으로서 마음에 새겨두고 지켜야 할 일들을 조목조목 자세하게 기록해 놓은 책입니다.
경세유표(經世遺表) 내가 살펴보건대, 마음을 분발하고 일을 일으켜서 천하 사람을 바쁘고 시끄럽게 노역시키면서, 일찍이 한번 숨쉴 틈에도 안일하지 못하도록 한 이는 요순이요, 또한 정밀하고 엄격하고 각박하여 천하 사람으로 하여금 조심하고 송구하여 털끝만큼이라도 감히 거짓을 꾸미지 못하도록 한 이도 요순이었다. 천하에 요순보다 더 부지런한 사람이 없었건마는 하는 일이 없었다고 속이고 천하에 요순보다 더 정밀한 사람이 없었건마는 엉성하고 오활하다고 속인다. 그래서 임금이 언제나 일을 하고자 하면 반드시 요순을 생각하여 스스로 중지하도록 한다. 이것이 천하가 나날이 부패해져서 새로워지지 못하는 까닭이다. 잘 정비된 수레를 잘 길들여진 말에다가 멍에를 메우고도 좌우로 옹위하고 수백 보쯤 전진시켜 보아 그 장치가 잘 되었는지 시험한 뒤에야 동여매고 몰아가는 것이다. 임금이 법을 제정하여 세상을 이끌어가는 것이 이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것이 곧 초본(艸本)이라 이름하는 까닭이다. 아아, 이것이 어찌 초본이 아니겠는가. <경세유표 서문, 1817년> <경세유표>는 당시의 법질서를 초월한 국정일반의 개혁지침서입니다. 다산이 국가기구 전체를 송두리째 혁신하기 전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본 혁명주의자와는 달리, 당장 읍단위의 지방정치부터라도 고쳐야겠다고 나선 것은 그의 개혁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흠흠신서<欽欽新書> 오직 하늘만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또 죽이기도 하니 사람의 생명은 하늘에 매여있는 것이다. 그런데 목민관이 또 중간에서 선량한 사람은 편안히 살게 해주고, 죄 지은 사람은 잡아다 죽이는 것이니, 이는 하늘의 권한을 드러내 보이는 것일 뿐이다. 사람이 하늘의 권한을 대신 쥐고서 삼가고 두려워할 줄 몰라 털끝만한 일도 세밀히 분별해서 처리하지 않고서 소홀히 하고 흐릿하게 하여, 살려야 되는 사람을 죽게 하기도 하고, 죽여야 할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오히려 태연하고 편안하게 지낸다. 더구나 부정한 방법으로 재물을 얻고 부인들을 호리기도 하면서 백성들의 비참하게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도 그것을 구휼할 줄 모르니, 이는 매우 큰 죄악이 된다. 흠흠(欽欽)이라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삼가고 삼가는 것(欽欽)은 본디 형벌을 다스리는 것이다. <흠흠신서 서문, 1822년> <흠흠신서>는 형벌 일을 맡은 벼슬아치들이 유의할 점에 관한 형법연구서이며, 살인사건 실무지침서입니다. 흠흠(欽欽)이란 걱정이 되어 잊지 못하는 모양을 말하는 것으로, 죄수에 대하여 신중히 심의(審議)하는 흠휼(欽恤)사상에 입각하여 재판하라는 것입니다.
[다산 문화관]
[다산 기념관]
거중기 수원성을 축조할 때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는 거중기 모형
여유당 - 다산 생가 다산 묘소가 있는 뒷동산에서 내려다본 다산 생가 모습입니다. 여유당(與猶堂)은 스스로를 경계하기 위해 지은 다산의 당호입니다. '더불다'는 뜻의 여(與)와 ‘오히려’라는 뜻의 유(猶)를 당호로 삼았습니다. 조선 후기 역사의 서광이던 실학을 집대성한 대학자가 될 수 있었던 데에는 이렇듯 끝없이 자신을 경계했기 때문이겠지요. 여유당(與猶堂)은 지금은 팔당 호숫가의 외딴 집으로 남아 있지만 다산 당년에는 그윽한 강마을의 저택이었습니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떠내려간 것을 1975년에 복원했습니다. 다산은 여기에서 세상을 떠났고, 이 집 뒷산에 묻혔습니다. 나라의 부패를 꾸짖던 선생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와 꼿꼿하고 검소한 그의 생활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한 걸음이면 뛰어 넘을 수 있을 것 같은 여유당의 낮은 담장에는 허물없이 백성들의 기쁨과 아픔을 함께하고자 했던 다산 선생의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다산의 묘 이백 년 세월의 바람 앞에 절로 고개 숙여지는 다산의 묘 모진 비바람에도 든든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소박한 護石의 보호아래 부인 풍산 홍씨와 함께 조용히 누워 있는 다산 선생의 묘입니다.
문도사(사당)
임금을 하직하려 하려니... 신은 지금 나아가도 있을 곳이 없고 물러나도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 어버이 무덤에 오르다 나는 정기를 늦게 받아 태어났기에 아버지께선 내 막내아들이라 하셨어요. 순식간에 30년이 흘렀는데 아버님 뜻을 기쁘게 해드리지 못했어요. ...... 어린 딸이 보고지고 어린 딸애 단옷날이면 옥 같은 살결 씻고 새단장했지. 치마는 붉은 치마 머리 뒤엔 푸른 창포잎 꽂았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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