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의 『 봉순이 언니 』는 1960∼1970년대 작가의 고향인
서울 아현동을 배경으로 나이 쉰이 다된 봉순이 언니의
인생유전에 관한 이야기다. 1963년 겨울에 태어난 "짱아"는
어릴 때부터 열세 살 식모인 봉순이 언니의 손에 길러지면서
세상과 삶에 눈떠 가는 과정을 다섯 살짜리 시선으로
잔잔하게 그려지고 있다.
소설 속의 주인공 짱아는 봉순이 언니를 이렇게 말한다.
"내 고향은 채송화꽃 핀 서울의 한 귀퉁이에는
나와 봉순이 언니가 있었다. 엄마였고 언니였고
그러면서 친구인 그녀는, 내 첫 사람이었다. "
이 소설은 1960,70년대 한국 사회를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60년대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하던 그 시절 "식모"로 불리던
여성들의 애환이 잘 그려져 있다.
그들은 자신을 위해 살기보다는 가족을 위해 살았고
주인집 사람들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 고도성장의 뒷골목에서
한없이 짓이겨지고 추락하는 삶을 살았지만,
삶에 대한 희망은 결코 버리지 않는다.
소설 속 봉순이 언니는 불행 앞에서도 마음 가득히
또 다른 내일에 대한 희망과 소망을 내걸며
그녀의 삶은 끝끝내 포기할 수 없는 희망으로 거듭난다.
끝내 절망을 외면하려는 희망에서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내일을 살아가는 삶의 지혜가 엿보인다.
봉순이 언니를 읽으면서 내내 아련한 옛 기억이 오버랩된다.
내가 초등학교, 중학교 다닐 즈음에 우리 집에도 봉순이 언니 같은
나보다 한 살 어린 동생벌 되는 여자아이랑 함께 살았었다.
어느 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니 아주 촌스런 여자 아이가 있었다.
꼬질꼬질 땟국이 흐르는 옷을 입고 있었는데, 이름은 혜숙이었다.
따뜻한 봄날이었는데도 혜숙이 손등은 갈라져 피가 질질 나고
머리는 얼마나 오래 안 감았는지 까치집을 하고 있었고
몸에는 심한 악취가 코를 진동했다.
어머니는 앞으로 우리와 함께 살 동생이라고 말씀하시고는
혜숙이를 데리고 목욕을 가셨다.
혜숙이네는 여동생과 남동생이 있는데, 그 아버지는 딸 둘을
모두 다 남의 집에 식모로 보냈다. 혜숙이 아버지는 혜숙이를
우리 집에 보내면서 월급 일년치를 선불로 주고, 그 다음해부터는
우리 집에서 혜숙이를 잘 키워서 좋은데 시집을 보내달라는 조건이었다.
어머니는 혜숙이 사정이 너무 딱하고 불쌍해서 데려왔다고 하신다.
혜숙이는 우리 집에 온 뒤로 살이 포동포동 오르면서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우리 집으로 오기 전에는 매일 밥을 굶고 살았으니
그 얼굴이 오죽하였겠는가.
살이 오른 혜숙이는 살결도 뽀얗고 마음씨가 고운 아이였다.
우리 식구들은 혜숙이를 식모라기보다는 친동생처럼 여겼다.
혜숙이는 우리 가족들 잔심부름을 도맡아 하면서 집안 청소며
어머니 부엌일을 도왔다.
한 번은 어머니가 아침에 먹을 쇠고기 국을 미리 끓여놓았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국이 반으로 줄어있고 쇠고기도 거의 없었다.
어머니는 혜숙이가 밤에 몰래 먹는다는 걸 아시고, 그 다음부터는
국을 더 넉넉하게 끓여놓으시곤 했다.
유달리 정이 많으신 어머니는 "어린 마음에 얼마나 고기가 먹고
싶었으면 밤에 몰래 먹었을까." 하시며 안타까워하셨다.
혜숙이는 초등학교도 3학년 때 중퇴를 해서 한글도 제대로 깨치지 못했다.
혜숙이는 늘 학교에 다니는 나를 부러워했고, 공부를 하고 싶어했다.
돈을 많이 벌어 동생도 공부시키고, 자기도 공부를 하겠다고 말했다.
공부를 하고 싶어하는 혜숙이에게 아버지는 한자를, 어머니는 한글을,
나는 영어를 가르쳐 주었다. 혜숙이는 틈틈이 열심히 공부를 했고,
우리 집에 온 것을 즐겁게 생각했다.
나와 혜숙이는 한 살 차이여서 식구들 누구보다도 더 친하게 지냈다.
혜숙이는 나를 보고 '언니, 언니" 하면서 잘 따랐다.
학교 갈 때 무거운 책가방을 버스 정류장까지 들어다 주기도 하고
집에 올 시간에 맞춰서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리기도 했다.
실내화를 뽀얗게 씻어놓기도 하고, 바쁜 아침시간에는 도시락이며
신발 주머니, 학교 준비물 같은 것을 잘 챙겨주었다.
시간이 갈수록 우리 가족은 혜숙이가 식모라기 보다는 한 가족처럼
느껴졌다. 가족나들이를 갈 때도 늘 같이 갔었고, 우리 집에 온 손님들이
누구냐고 물으면 어머니는 우리 집에 딸이 적어서 하나 더 낳았다고
웃으면서 말씀하시곤 했다. 실은 우리 집은 딸이 적은 게 아니라
남들에게 딸부자로 통했었다.
일년이 지나자 혜숙이 아버지는 우리 집을 다시 찾아와서 일년치 월급을
또 선불로 달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하는 수 없이 요구하는 돈을 주고
다시는 찾아오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았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혜숙이 아버지는 그 다음해도 그 다음해도 또 돈을 선불로 가져갔다.
세상에 아버지라고 불리는 사람이 어쩌면 저럴 수도 있을까...
그 아버지란 사람은 일은 하지 않고, 딸 둘을 남의 집 식모살이를
시키면서 벌어들인 돈으로 유유자적 생활을 하고 있었다.
무능하다기보다는 파렴치한 인간이었다.
혜숙이는 아버지의 횡포가 날로 심해져 가자 더 이상 참지를 못하고
아버지가 모르는 곳으로 도망쳐야겠다고 했다.
어머니의 알선으로 공장에 취직을 하고 혜숙이는 우리 집을 떠났다.
혜숙이가 떠난 뒤에도 몇 차례 그 아버지란 사람이 술을 마시고
우리 집을 찾아와 혜숙이를 찾아내라고 협박을 하곤 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후한이 두려워 돈을 몇 푼 집어주곤 하셨다.
우리 집을 나간 뒤로도 혜숙이는 아버지 몰래 우리 집을 찾곤 했다.
올 때마다 언니들이 안 입는 옷이며 신발을 한 보따리 챙겨서 가져갔다.
혜숙이는 공장 일이 힘에 부치는지 얼굴이 점점 못쓰게 되었다.
혜숙이는 아버지가 자기를 찾으러 다닌다는 소문을 듣고는
우리 집에 오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더니 연락을 뚝 끊어버렸다.
칠순이 넘으신 우리 어머니...
TV에서 "사람을 찾습니다." 프로그램을 보실 때면
혜숙이를 찾고 싶어하신다.
지금 어떻게 잘 살고 있는지 궁금하시다고 그러신다.
어느새 나처럼 사십 중반에 들어선 혜숙이...
공지영의 봉순이 언니처럼 우리 혜숙이도 푸른 하늘을 이고
희망을 잃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으리라.
글/러브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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