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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은의 『 먼 그대 』

러브송. 2006. 11. 3. 20:31
주위 사람들이 보기에 문자는 그저 '죽은 듯이 가만히 있는 사람' 으로만 보였다. 그네들은 아무도 문자의 그런 침묵이 '어떤 상황, 어떤 조건 아래서도 나는 살아갈 수 있다.' 는 절대 긍정적 자신감에서 기인된다는 것을 몰랐다. 더욱이 그 자신감이, 자신들의 키를 훨씬 넘어 아주 높은 곳에 있는 어떤 존재와 겨루면서 몇 만 리나 되는 고독의 길을 홀로 걸어오는 동안 생겨난 것이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 "고통이여, 어서 나를 찔러라. 너의 무자비한 칼날이 나를 갈가리 찢어도 나는 산다. 다리로 설 수 없으면 몸통으로라도 몸통이 없으면 모가지만으로도 지금보다 더한 고통 속에 나를 세워 놓더라도 나는 결코 항복하지 않을 거야. 그가 나에게 준 고통을 나는 그를 철저히 사랑함으로써 복수할 테다. 나는 어디도 가지않고 이 한자리에서 주어진 그대로를 가지고도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테야. 그래, 그에게 뿐만 아니라 내게 이런 운명을 마련해 놓고 내가 못견디어 신음하면 자비를 베풀려고 기다리고 있는 神에게도 나는 멋지게 복수할 거야!" ... "고통의 사닥다리를 오르는 일이 다 쓸데없는 짓이라면? 이 길의 끝에 아무것도 없다면? 모든 것이 다 조작된 의미라면? 아픔과 고통의 끝이 또 다른 아픔과 고통의 연속으로 이어진다면...?" ... 문자는 잠자코 그에게 윗도리와 외투를 입혀 주었다. 순간순간 그의 모질고 이기적인 성격을 엿볼 때마다 문자는 맘속으로 울고 입술로는 웃었다. 그가 단추를 채우는 동안 문자는 먼저 부엌으로 나와서 그가 신기 좋게 구두를 가지런히, 그리고 약간 벌려 놓아 주었다. 밥을 푸다 만 밥솥에서 김이 서려올라 자욱했다. 문득 쓰라린 비애를 느꼈으나 그녀는 조용히 웃었다. 한수는 문자가 문밖에서 배웅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곧장 뚜걱뚜걱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그는 언덕을 내려가 잠시 후엔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문자에겐 그가 자기 시야에서 끝도 없이 멀어지고 있을 뿐인 것으로 느껴졌다. 그는 이미 한 남자라기보다, 그녀에게 더한층 큰 시련을 주기 위해 더 높은 곳으로 멀어지는 신의 등불처럼 여겨졌다. 그리하여 그녀는 도달하고픈 열렬한 갈망으로 온몸이 또다시 갈기처럼 펄럭였다. ... 대학을 졸업하고 소위 신부수업이란 미명하에 無爲徒食할 즈음 "1983년도 제7회 이상문학상작품집"을 읽게 되었다. 그 작품집에 실려있던 "서영은의 먼 그대"가 유독 가슴팍에 박혔다. 결혼을 하고도, 잦은 이사에도 '서영은의 먼 그대' 는 늘 나와 함께 있었다. 그런던 어느날, 책장을 구석구석 아무리 뒤져봐도 그 책을 찾을 수 없었다. 그후로 '먼 그대'는 나의 마음에서 잊혀지고 있었는데 며칠 전 우연히 딸아이 논술 교재에 실려 있지 않은가. 반가운 마음에 단숨에 읽어내리며 문자를 생각했다. 힘든 사막을 가는 낙타... 타인과의 관계에서 힘들 때마다 문자는 낙타 한마리를 꺼낸다. 고통을 철저히 사랑함으로써 침묵 속에 사랑과 인내를 키워가는 문자의 모습은 매우 수동적이지만 숭고함이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그 옛날에도 지금도 문자에게서 동질감을 느끼는 이유는 뭘까? 아무 것도 일치않는 상황인데도, 늘 문자가 나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 이유를 지금도 알 수 없지만, 난 문자가 좋다. 갈가리 찢겨진 몸으로라도 도달하고픈 그곳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문자가 나는 좋다. 글/러브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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