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봉사]
쌍봉사 해탈문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고,
생과 사, 만남과 이별 역시 그 근원은 모두 하나입니다.
해탈문 넘어 솔바람 머문 이곳에 들러
삶에 지친 육신과 마음을 편히 쉬게 하십시요.
쌍봉사는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쌍봉리, 쌍봉산 깊은 산중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뒷산의 봉우리 두 개가 이어져 있어 쌍봉사라고 했다고도 하지만, 절을 개창한
철감선사 도윤의 법호가 쌍봉이라서 그것을 딴 듯합니다.
그런데 철감선사 보다 앞선 시대인 839년 이전에 창건되어 혜철선사가 여름을
지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어쨌든 쌍봉사는 철감선사를 맞아 대가람으로
사세를 키운 것은 분명한 듯합니다.
쌍봉사 대웅전
해탈문 앞에 서면 기둥 사이 네모칸 안에 대웅전의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삼층목탑의 형태를 갖춘 대웅전은 본래 우리나라 목탑의 전통을 이어온 보물이었지만
지난 1984년 화재로 모두 불타고 말았습니다.
지금 것은 정면 1칸, 측면 1칸에 3층 목탑형식을 한 독특한 집으로 1986년 말에 복원할 때
1962년 대웅전 해체, 수리시 발견된 기록에 따라 새로 지었습니다.
쌍봉사 극락전
극락전 앞에는 단풍나무 두그루가 있고 왼쪽에는 무성한 대밭이 있습니다.
극락전 아미타여래좌상
쌍봉사 극락전에 모셔져 있는 앉은 모습의 아미타여래상입니다.
원래는 양 옆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의 협시불과 함께 삼존의 형식을 갖추고
있었으나, 1989년 8월경 양 협시불을 도난당하여 이후에 새로 조성한 것입니다.
나무로 만들어진 아미타여래좌상은 사각형에 가까운 얼굴을 하고 있으며
등이 약간 굽은 모습입니다. 머리는 소라모양의 나발이고, 짧은 목에는
삼도가 얕게 그려져 있습니다. 양어깨를 모두 감싼 옷의 주름은 뚜렷하면서도
두툼한 느낌을 줍니다.
오른손은 올리고 왼손은 내린 모습인데 양손은 모두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는 손모양을 하고 있으며 오른다리를 왼다리 위에 걸쳐 앉아 있습니다.
쌍봉사 범종각
쌍봉사 지장전
쌍봉사 나한전
나한전 내부
나한전에는 목조석가여래좌상을 비롯하여 16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모두 근래에 조성된 것입니다. 본존불 좌우로는 아난ㆍ가섭존자를 비롯하여
16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협시인 아난과 가섭존자는 입상이고
나머지 나한상들은 각기 다양한 모습으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부도탑 가는 길
철감선사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로, 28세 때 중국 당나라로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였습니다.
문성왕 9년(847) 범일국사(梵日國師)와 함께 돌아와 풍악산에 머무르면서 도를 닦았으며,
경문왕때에 이 곳 화순지역의 아름다운 산수에 이끌려 절을 짓게 되는데, '쌍봉'인 그의
호를 따서 ‘쌍봉사’라 이름하였습니다. 경문왕 8년(868) 71세로 이 절에서 입적하니,
왕은 '철감'이라는 시호를 내리어 탑과 비를 세우도록 하였습니다.
철감선사 부도비
비문을 새긴 비석의 몸체는 없어지고 거북받침돌(귀부)과 머릿돌(이수)만 남아있습니다.
네모난 바닥돌 위의 거북은 용의 머리를 하고 여의주를 문채 엎드려 있는 모습입니다.
이 모습으로 대략 9세기경 부도가 한창 만들어질 때의 전형적인 부도비 모습입니다.
이 부도비의 거북이는 특히 오늘쪽 앞발을 살짝 들어 올리고 있어
막 출발하려는 생동감을 주고 있어 흥미롭습니다.
머릿돌은 용조각을 생략한채 구름무늬만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통이신라 경문왕 8년(868)에 세워진 비로 전채적인 조각수법이 선명하고
생동감있는 조각들은 당대 조각예술의 수준을 가늠하게 해줍니다.
철감선사탑
쌍봉사(雙峰寺)에 세워져 있는 철감선사의 부도입니다.
철감선사의 사리를 보존하기 위해 만든 이 부도는 누구의 솜씨인지 알 수 없으나
우리나라 부도의 원조격이라 평가되며, 지리산 피아골의 연곡사 동부도와도 흡사하며
부도 초창기의 작품으로 창의성이 돋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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