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생은 모으면서 살고, 반생은 버리면서 산다던가.
땅에 처음 떨어질 때는 육체와 감각뿐이다.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는 빈 그릇이다.
그러나 세 살만 되면 자기 장난감과 남의 장난감을 구별한다.
다른 아이가 자기 것을 만지면 빼앗으려고 덤벼든다.
빈 그릇에 욕망의 싹이 생겨나는 현상이다.
유치원, 초등학교를 가게 되면 새것을 배우고 다른 사람과 사귀며,
꿈을 키우고 남보다 잘하려고 경쟁심도 가진다.
그리하여 30세쯤 되면 사람이 겪는 일은 거의 다 경험한다.
현재까지 가진 것이 무엇이고, 가질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도 안다. 그리고 가질 수 없는 것도 예측한다.
욕심을 부려보아야 안 된다는 것을 자각하면서
한번 체념한 것은 아예 생각도 않는다.
40을 넘기고 50에 이르면 자기 한계를 깨닫고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그 생각에 이르지 못하였을 때
그는 욕심이 너무 많거나 깨닫는 지혜가 부족한 사람이다.
사람들은 너무 가지려고 하다가 가진 것조차 잃는 사람이 많다.
어디까지 가져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는 데에 그칠 뿐 실행이 안 된다.
그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한계인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무엇을 버리지 못하고 있느냐?
돈인가 명예인가 사랑인가 미움인가 아니면 자존심인가 열등감인가
더듬어 나가 보면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너무 많다.
버리면 야단날 것만 같다. 빈 껍데기만 남을 것 같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버린다 해도 그것들이 어디에 가겠느냐이다.
어디엔가 떨어져 있을 것 아닌가. 다만 나에게서 놓여졌을 뿐이다.
허공에 돌아다닐 수도 있고 땅에 굴러다닐 수도 있다.
산산조각이 나서 흔적도 없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우주 안 어디엔가에 있다. 있으면 그만 아닌가?
반드시 그것들이 나에게 붙잡혀 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
숫자의 영(零)을 생각해 본다.
영은 아무것도 없음이다. 완전한 빈자리이다.
그것에 1 2 3 4…를 보태기도 하고, 1 2 3 4…를 빼기도 한다.
그 중간인 영(零)은 空 또는 無이다. 원점이라고 할까.
사람들이 가진 것을 놓는다는 것은 원점인 零으로 돌아감이다.
나기 이전에 우리는 어디 있었던가? 그곳이 곧 零의 자리였다.
아무것도 아닌 자리에서 나는 태어났다.
그리하여 한 생애를 살고 돌아가는 곳도 나기 이전의 그 원점이다.
원점에서 와서 원점으로 돌아간다고 할까.
그것을 사람들은 자연에서 와서 자연으로 돌아간다고 말하기도 한다.
아침을 먹고 열 시쯤 되면 끈이 길게 달린 가방을 들고 나는 집을 나간다.
나가 보면 세상이 너무 넓다. 하늘은 높게 높게 터져서 파랗고,
길 좌우에는 크고 작은 나무들이 무성한 잎을 달고 여름을 흔들고 있다.
그 가운데를 걸어가면서 현재 나를 묶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를 찾아본다.
그러면 어떤 때는 어제 낮부터 가슴에 걸려서 떨어지지 않던 자존심일 때도 있고,
어떤 때는 쓰다가 쓰다가 둔 원고 내용이 아직 남이 있을 때도 있다.
그것들이 다 무엇인데 하면서 큰마음으로 떼어 낸다.
붙어 있는 종이를 떼내듯이 아니면 핀셋으로 바늘을 찝어 내듯이…….
그럴 때마다 내가 얼마나 소인인가를 깨닫는다.
그런 작은 일에 매달려 있는 나 자신이 불쌍해지기도 한다.
떼고 나면 시원하다. 원점으로 돌아가는 기분이다.
하늘은 더욱 파래지고 건물과 사람과 나무와 자동차들이 전체가 되어
나의 가슴 안에 수용이 된다. 수용! 그것을 나는 조화로 느낀다.
그 조화에 취해서 그때부터 나는 유쾌한 아침을 걷는다.
김/시/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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