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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고창] 고창의 유명한 문화재 고창읍성

러브송. 2007. 5. 21. 07:59
[ 고창 읍성 ]
고창읍내에 들어서면 조선 초기의 성곽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 성곽이 바로 사적 제145호로 지정된 고창읍성입니다.
조선 단종 원년(1453)에 외침을 막기 위하여 전라도민들이 유비무환의 슬기로 총화 축성한 자연석 성곽입니다.
이 성의 둘레는 1,684m이며, 모양성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백제 때 이곳의 지명이 모량부리였던 것에서 유래된 듯합니다.
고창읍성의 수려한 자연경관이 우리의 눈길을 끄는데 이 읍성에는 마을 주민이 살지 않고 원님만 살았답니다.
[모양성제]
모양성제는 유비무환의 호국정신으로 총화축성한 고창읍성(모양성)의 얼을 계승하고 향토문화의 우수성을 선양하고자 1973년부터 중양절(음력9월9일)을 전후하여 4일간 개최됩니다. 고창 모양성제는 고창군민 모두가 참여하여 만들어가는 문화관광 축제입니다.
제등행진, 국악공연으로 꾸며지는 화려한 전야제를 시작으로 전국 유일의 답성놀이, 전통혼례식, 원님부임 행차, 성쌓기 재현, 조선관아 체험,고인돌 체험마당, 판소리 명창 공연, 각종 전시회 및 축하공연 등 다채롭고 유익한 갖가지 체험행사가 개최됩니다.
성을 한 바퀴 돌면 다릿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며, 세 바퀴 돌면 극락승천 한다는 전설에 따라 1년내내 수많은 내외국인들이 답성놀이 관광객으로 붐비고 있으며, 특히 고창 모양성제 기간에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부녀자들의 답성놀이 행렬이 장관을 이루어 축제의 분위기를 한층 돋구곤 합니다.
평시에 성밟기는 윤달, 그 중에서도 윤삼월에 해야 효염이 많다고 하며, 특히 초엿새, 열엿새, 스무엿새등 여섯 수가 든 날은 저승문이 열리는 날이라 하여 더욱 많은 여자들이 찾아와 성밟기를 합니다. 특히 윤삼월의 효험을 강조하고 있음도 겨우내 부풀었던 성을 밟아 굳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고, 머리에 돌을 이게 함으로서 체중을 가중시켜 성을 더욱 다지게하는 의도에서 였을 것입니다.
성을 다 밟은 후에는 머리에 이었던 돌을 성 입구에 쌓아두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것은 유사시 석전(石戰)에 대비하기 위한 유비무환의 예지라 생각됩니다. 요즘에는 주로 음력 9월9일에 열리는 모양성제 때에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민속놀이를 통해 우리조상의 슬기를 엿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동원을 강제하지 않고 스스로 참여시키는 독특한 우리문화의 양상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성곽의 입구 모습입니다. 이 성곽은 계유년에 호남의 여러고을 사람들과 힘을 합쳐 축성되었다고 성벽에 새겨져 있습니다.
성안으로 들어서면 처음 보이는 건물이 감옥입니다. 아마도 이곳에서 나쁜 짓을 하면 감옥에 간다는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 아닐까요?ㅎㅎ.. 죄인을 가두는 곳으로 감옥 또는 원옥이라고도 합니다. 조선시대의 옥은 대개 관아의 입구에다 짓고 동쪽 칸과 서쪽 칸에 남·여 옥을 나누어 만들고 높은 담을 둥글게 둘러쳤는데 그래서 생겨난 이름이 원옥입니다. 이 자리에는 조선시대의 옥이 있었으나 건물은 없어지고 터만 남아있던 것을 1983년에 발굴조사하여 확인된 유구와 각종 자료를 참고하여 2000년에 원 모습으로 다시 지었습니다.
읍성내는 울창한 나무와 예쁜 꽃으로 잘 단장되어 있습니다.
[ 동헌 ]
성 안에는 동헌·객사를 비롯하여 22동의 관아건물들로 되어 있었으나 대부분 손실되었습니다. 조선시대의 목과 도호부 ·군·현 등 각 행정단위에는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이 정무를 보던 청사를 세웠는데, 이를 일반적으로 동헌이라 합니다. 건물 정면에는 백성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고을을 평안하게 잘 다스린다는 뜻의 평근당이란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이 자리에는 조선시대의 동헌이 있었으나 건물은 없어지고 터만 남아 있던 것을 1987년에 발굴조사하여 확인된 유구와 각종 자료를 참고하여 1988년에 원 모습으로 다시 지었습니다.
[ 고창객사 ]
조선시대에는 각 고을에 객사라고 하는 관아가 있었습니다. 중앙의 몸채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그리고 나라의 경사와 궂은 일이 있을 때 대궐을 향하여 예를 올렸으며 왼쪽과 오른쪽 방은 조정에서 파견된 관원들의 숙소로 사용되었습니다. 본관의 현판에 쓴 모양지관의 모양은 예로부터 이 고장을 모양고을이라 하였고, 이 성을 모양성이라 불러온데서 비롯된 당호입니다. 이곳에는 조선시대의 객사가 있었으나 건물은 없어지고 터만 남아 있던 것을 1988년 발굴조사하여 확인된 유구와 각종 자료를 참고하여 1991년에 원 모습으로 다시 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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